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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P에서 만난 북한약사들, 우리말 통하니 편해지더라"

  • 강신국
  • 2019-10-21 01:43:45
  • [인터뷰] 박명숙 대한약사회 국제이사
  • "약사는 하나라는 공감대 있었다...남북약사 교류 물꼬"
  • "어머님은 민주화 투사...영향 많이 받아"
  • "남편인 이재현 교수는 동반자이자 지원자"

[데일리팜=강신국 기자] 지난달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2019년 FIP(세계약사연맹)총회에서 북한약사들을 만나고 온 박명숙 국제이사(60, 덕성약대)

박 이사는 지난해 11월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평양방문 단장으로, 평양에 다녀오는 등 남북 보건교류협력에 앞장서 왔다. 이번 FIP 아부다비 총회에서 북한약사들과의 만남도 이런 박 이사 노력의 결과였다.

데일리팜은 박 이사를 만나, 북한약사들과 만남과 향후 계획, 다양한 사회참여활동과 남편인 이재현 성균관대 약대 교수,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 알려진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아부다비총회에서는 처음으로 북한약사들이 참석해 남북 약사간 만남도 이뤄졌다. 현장에 계셨는데 어떤 말들이 오고갔나.

약사라는 하나의 공감대가 있었다. 국제 협력이 어떻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이번 남북약사들의 만남이었다고 본다. 사실 남북약사가 함께 만나 양국 국민들의 보건향상을 위해 교류 협력하면 좋겠다는 것을 생각한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현재 남북관계는 그러한 일을 성사시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이번과 같이 FIP 초청 형식으로 남북한의 제약부분과 병원부분에서 일하고 있는 약사들이 함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약사'라는 하나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북한약사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FIP 총회 운영방식과 참여 방법 등등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게 되면서 조금씩 친해져갔고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할 정도가 됐다. 이번 만남은 FIP 협력을 이끌어 낸 약사회의 역량과 국제적인 위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FIP 차원에서도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었다.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FIP 총회에서 도미니크 조단 FIP회장이 이번 북측 참가가 얼마나 FIP 역사상 큰일이었는지 여러 번 언급할 정도였다.

- 남북 약사간 만남에 대한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주 이례적인 이벤트였다. 지난해 2018년 11월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평양방문 단장으로서 평양에 다녀오는 등, 지난 20년간 남북 보건교류협력 관련한 일로 지속적으로 일해 왔다. 하지만 이번같이 약사들을 만나서 약업관련 이슈를 갖고 충실하게 대화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실무를 책임졌던 국제이사로서 큰 자부심이 있다. 김대업 회장 이하 우리 대표단과 이성일 단장을 비롯한 북측대표단의 진정성과 도미니크 조단 FIP회장을 비롯한 실무임원진들의 열정으로 이러한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향후에 남북 약사들의 교류 협력은 계속 발전시켜야한다고 보고 그러한 일들을 위해 현재도 국제적인 공조로 이룰 수 있는 몇 가지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약사 교류의 장을 열어 남북 공히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약사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싶다.

임용철 민화협부의장과 남측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북한 방문단
- 남북문제를 대한약사회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번 만남의 주무 담당인 국제이사로서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어떻게 준비했나.

평화통일문제는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라.나도 이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 하고 활동도 해 왔다. 구체적으로 2007년부터 당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성공회 내에 TOPIK(현재는 평화를일구는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대북지원사업과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금강산 지역이나 개성지역, 평양 등을 방문한 적 있다. 여기에 북한의 보건의료와 의약산업에 대해 연구를 하고 싶어, 2012년부터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에 가입해 활동 하면서 민화협과 같이 보건의료부분 교류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방문 단장으로 평양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약사회가 남북관계 개선에 구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남북관계 개선은 정치, 군사적인 탑-다운 과제도 있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한 저변 확대가 중요하다. 보건의료부분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인 입장을 넘어 인도적 차원에서 순수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약사회는 약사라는 중요한 인적 자원을 중심으로 정보 교류는 물론 제약과 의약품산업유통 기술 교류 등을 잇는 중심축이 될 수 있다.

-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어머님이 민주화운동의 투사로 알려져있다.

나의 힘의 원천은 3가지다. 첫째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가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여성문제와 남북문제, 보건문제에 지속적인 조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왔다는 것, 셋째로는 통일보건의료 정책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정책입안에 지원그룹이 있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인 친정과 함경남도 북천이 고향인 시집을 둔 전형적인 실향민 가족으로서 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몸으로 느끼고 살아왔다. 1986년 막내동생의 투옥으로 인해 친정부모님은 양심수가족이 됐다.

우리 어머니는 처음 동생일 잡혀갔을 때는 대통령(당시 전두환대통령)에게 '나쁜 친구의 꼬임으로...'라는 말로 탄원서를 썼을 정도로 정권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말을 들어보고, 동생을 면회하면서 '그것이 아니구나!'하는 자각이 생기셨던 것 같다.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매일 만나는 엄마들과 함께 부당히 가두고 고문하는 일들을 고발하고, 구속된 아이들의 석방을 위해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어 유가족협의회와 함께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이하 민가협)'를 만들며 우리나라 민주화의 투사로서 삶을 사셨다. 나의 어머님, 임기란 여사는 민가협 상임의장으로서 가보지 않은 교도소가 없고, 투쟁 안한 국가폭력이 없었다. 이렇게 민가협 어머님들은 제일 앞장서서 화통같은 목소리로 준엄하게 불의를 따졌고,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엄혹한 시절에 양심수들을 위해 싸우셨다.

- 약사회 활동보다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많이 해 왔다고 들었다.

1996년 안양평촌에 살면서 신도시의 문제점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지역 여성들이 하기 시작했다. 몇 건의 큰 가정폭력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여성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역의 여성들과 힘을 합쳐 '안양여성의전화'를 자생적으로 만들고, 회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2009년 덕성여자대학교 총동창회장과 학교법인 덕성의 이사로서 학내분규를 안정화 시키고 학교를 정상화 시키는데 기여했다. 2008년부터 4년간 (사)'탈북여성지원GFS 우물가'를 만들어, 탈북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사업을 위해 본부장으로서 일했다.또한 대북지원사업을 위한 '평화를일구는사람들'을 만들었고 2012년부터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약업계 활동 이야기로 돌리면 약대를 졸업하고 약국을 10여년간 운영했다. 약국을 한다는 것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정말 신나면서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아픈가, 왜 어떤 이들은 아파도 약을 먹을 수 없는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됐던 고민의 시기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사회제도와 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본격적인 사회운동 참여를 위해 약국을 접었다. 현재는 약사로서 지오영 고문으로 의약품 유통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3년 전부터는 의약품 유통에 관심이 많은 약사들과 정책전문가 그룹을 만들어 의약품산업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 부군이 성균관대 약대 이재현 교수다. 같은 약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이재현 교수는 내게 한 가정을 같이 꾸리는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저의 뜻을 잘 이해하고 적극 지지해주는 가장 가까운 지원자다.이 교수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 담당 공무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듯 보이는 의약분업이 시행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에 따라 당시 약계의 숙원이던 의약분업을 기획하고, 마침내 2000년 7월 이를 실행에 옮기는데 복지부 담당 사무관으로써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같이 토론할 때가 많다. 그러한 토론이 나를 성장하게 하고 더 나은 정책전문가로서의 나 자신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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