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그 속엔 약사가 있었다…비밀결사조직도 구성
- 정혜진
- 2019-03-28 10: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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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약 '건약 30주년 및 3.1운동 100주년' 순회 포럼
- 역사 속에 투신한 약사들, 독립운동 적극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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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가 특별한 포럼을 진행했다. 3.1운동에 참가하고 의열단에 입단하는가 하면, 교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 속 약사, 약대생을 다시 조명하는 자리를 열었다.
27일 건강사회약사회 강당에서 진행된 '역사를 만들어낸 약사들' 순회 포럼은 건약 윤영철 공동대표가 강연을 맡았다. 윤 대표는 방대하고 세밀한 자료로 잊혀졌던 역사 속 약사들을 100년 후 서울에 소환했다.

일제시대 약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약사'(약제사)가 탄생한 맹아부터 살펴봐야 했다. 윤 대표는 약제사 맹아로, 지금의 을지로입구역에서 3가까지 이어지는 언덕 근방의 '구리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구리개에는 조선초부터 혜민서가 있어 의생들이 모여 살았다. 의생들은 왕가에서 가까운 구리개에 터를 잡고 왕가와 양반을 치료하고 공부도 하며 세를 넓혀갔다. 왕실은 이들에게 한약 독점권을 부여했는데, 당시 서울의 모든 한약은 구리개에서만 최급했다. 이 독점권은 대대손손 자식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시대로 넘어오며 약제사들은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일본인 매약상이 충무로에 성장하며 큰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 조선의 한약업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양약'의 공부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1908년 '약업총합소'를 결성, 비수기인 여름철을 틈타 '양약 취급하기' 강습회를 열었다.

윤 대표는 "약학사(史)가 자리잡지 못한 데에는 우리 약사들의 무관심과 친일파가 만든 학교가 모태라는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약학강습소는 한약업자들이 주가 되어 자발적으로 결성한 것일 뿐, 일제가 주도한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약제사들은 1년짜리 강습소가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정식 학교 출범을 준비한다. 여기엔 서울에서 돈을 벌던 일본 약제사들의 '약제사 인력 니즈'와 약학교를 설립하고자 한 한국 약제사들의 니즈가 주효했다.
조선약학교 설립하자마자 터진 3.1운동
이윽고 1918년 4월9일 '조선약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아 1918년 5월 개교한다.
조선약학교는 현재 종로5가 파고다공원 주변에 위치했는데, 학교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1919년 2월15일 전동환 등 종교지도자들이 약학교 학생들을 찾아와 독립선언문과 3.1운동 참여 독려 연설을 연설했다. 3.1운동 보름 전의 일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선약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무교동 대한문 등을 행진했다. 일제가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3.1운동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고향으로 피신해 각 고향에서 독립 시위를 도모한다. 일제의 탄압은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검거된 학생은 김유승(26), 김광진(21), 박준영(23), 박병원(23), 박흥원(23), 박희창(21), 오충달(24), 전동환(34), 김정오(22), 강일영(19), 김용희(19), 이인영(19), 정태화(24), 이용재(25), 김공우(17) 등 15명이었다. 심문조서에 없지만 추가로 거론된 약학교 학생도 강신술 등 9명에 달한다.
일제는 유관순 등 감시대상인물카드를 만드는데, 카드에 남아있는 감시 대상 4858명 중 약학교 학생은 5명이다. 당시 약학교 급장이었던 전동환을 비롯해 이용재, 김공우, 이인영, 김용희 등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적은 감시대상인물카드가 아직도 남아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조선약학교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졸업생 30명 중 11명이 약제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중 조선인은 이호벽과 신경림 2명 뿐이었고 이호벽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약제사 면허자가 된다.
이호벽은 나중에 자서전에서 "동료들은 만세운동으로 잡혀갔으나 나는 당시 너무 어려 참여하지 못했다. 만세운동 후 조선인 학생 수는 10여명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약제사 시험을 거쳐 졸업한 조선인 동기는 6~7명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3.1운동 후 무장투쟁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의열단을 구성했는데, 여기에 관련된 약제사도 있다. 윤충식, 신병환 등이 약제사로서 의열단 명단에 이름이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약학교는 첫 여약제사도 배출한다. 조선약학교는 조선 최초의 남녀공학교인 셈이다. 1922년 당시 3명의 조선여학생이 입학하는데, 차순석, 김려윤, 김순복 등이다.
쌀 한가마가 4원이던 시절, 약사 월급이 60원이나 했다는 기록을 생각했을 때, 여약제사는 남자에 뒤지지 않는 최고 엘리트였던 셈이다. 이 중 김순복은 1901년 평안남도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남녀차별이 당연시 되던 시절, 여성운동 대표자로 활동하며 여성 계몽과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대중강연과 웅변가로도 유명했다.
한 예로 김순복이 웅변대회에 나선 기사를 보면 "몇해 전 독립운동 때에 (여성이) 운동에 참가하려하나, 가족(아이)을 맡길 데가 없어 자기의 영감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애달픈 일입니까"라는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김순복은 여성잡지를 창간하고 신간회, 근우회 등을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과 민족대표자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나 1930년대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경성약전 1학년 학생들은 1938년 축구부를 가장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41년 10월 일본경찰에 발각될 때까지 축구부 비밀결사는 이어졌다.
여기에는 경성약전 1학년 대표 김철용을 비롯해 이영진, 위선환, 김시연, 오상흠, 오은성, 박중호, 신현우, 전기찬, 김성익, 김병조 등이 활동한다.
이중 오상흠은 41년 약전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던 중 44년 정문규로부터 독립운동에 사용할 폭탄제조를 권유받고 제조하려다 실패, 발각됐다. 오상흠은 46년 조선약학회 창립에 기여하고 49년 사망했다.

윤 대표는 "아마 역사에 투신한 약제사 중 극히 일부일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에 나섰고 발굴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어 "3.1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조선 민초들이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으로 가는 발판을 만든 핵심 사건이었다"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기록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많다. 나머지는 약학사를 이어받을 후배들의 몫"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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