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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피난처서도 약대 수업은 계속됐다

  • 정혜진
  • 2017-06-25 06:00:45
  •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 약대생 참전·전쟁 상황 묘사

피난처에서도 약대 수업은 계속됐다. 교재와 실험도구를 아껴가며 서울대 약학대 교수와 학생들은 구급 현장에 필요한 약사배출을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대 약학대가 발간한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에는 전쟁 상황에서도 피난처에서 약학대 수업을 계속하고 이후 약대 교육의 뿌리가 된 전쟁 당시 약대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전쟁이 67주년을 맞아 '100년사' 내용을 참고해 전쟁 당시 약학대 모습을 전한다.

부간 피난처애서 수업을 받고 있는 서울대학교 약학대 학생들(출처;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
서울약학대, 국립대 편입되자마자 6·25 발발

정부는 1950년 6월 초, 당시 사립이었던 서울약학대학을 국립대학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점령됐고, 문교부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수복해 9월 30일이 돼서야 약학대를 국립으로 편입시켜 한구동 교수를 임시책임자로 임명했다.

서울약학대가 개교 준비를 하는 사이, 중공군의 침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결국 약학대는 국군과 함께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초대 학장이었던 한동구 교수의 기록을 보면 '나는 책임자에 임명되자마자 피난 준비에 눈코뜰 사이가 없었다. 중요한 서류(학적부, 비품대장 등)는 물론 당시 비교적 귀중하게 생각되었던 기계기구류(천칭, 현미경 등)와 당장 필요한 문헌서적, 식물표본 등을 정돈해서 트럭에 싣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먼저 보냈다. 나는 나머지 서적은 며치이 걸려 모두 도서실 천장 속에 감추고 12월 14~15일 경 책임자는 최후까지 서울에 남으라는 정부 명령에 따라 단신 서울에 잔류해 있다가 12월 하순에 공무원 최종 피난 반에 끼여 인천항에서 LST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적었다. ('한국 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 중)

피난처에서 교사를 제공한 제약사들 (출처;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
약대생 참전 후 순국...제약사 도움으로 교사 마련

이미 알려진 대로 당시 서울약학대학에 재학 중이던 송득규, 박원종, 서찬식 학생은 전쟁에 참전해 순국했다. 한편 피난지인 부산에 머무르던 동안에도 약학대 수업은 지속됐다.

당시 문교부는 51년 5월4일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했는데, 이는 전쟁 중 정상수업을 받지 못하는 대학생이 다른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고 단독 수업이 어려운 대학은 연합대학을 만들어 합동 수업이 가능토록 한 조치였다.

이 시기 국립서울대 약학대는 잠시동안 이화여대 행림원 약학부와 함께 의약학부에 포함돼 수업을 했고, 부산 소재 제약사인 계림화학공업 김근규 사장과 영도 소재 대한비타민화학공업사(현 대웅제약 전신) 지달삼 사장 도움으로 교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구동 교수는 '계림화학주식회사는 사무실과 공장 일부를 약대 사무실과 실험실로 제공해주었고, 대한비타민주식회사는 공장 부지에 교실 4개를 지을 수 있게 빌려주어 목조 바라크를 급조해 교실 4개와 사무실 1개를 만들어 강의를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상섭 교수는 '나무막대기로 창틀을 만들고, 유리가 아닌 철사가 들어간 비닐을 끝부분에 붙여서 못을 치면 창문이 됐다. 바닥은 농촌 비닐하우스처럼 흙을 좀 높이고 옆에 홈을 파서 물이 빠져나가게 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울대 약학대는 1951년 9월 1일 전시연합대학을 청산하고 단독 개강했다.

휴전반대 시위 하는 서울대 약학대 학생들(출처;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
100년사에 따르면 부산 피난 시절 이길상 교수의 정성분석화학은 명강의로 인기가 높았고, 영어를 가르치던 김성환 교수는 '토마스 하디'의 단편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했다.

1951년 11월 당시 약학대에는 교수 2명, 부교수 1명, 조교수 3명, 전임상사 4명, 조교 1명 등 총 11명의 교직원이 근무했다.

당시 피난지에서 학생은 423명으로, 남 297명, 여 126명이었으며 수업 과목은 ▲분석화학교실 ▲무기약품화학교실 ▲유기화학교실 ▲생물화학교실 ▲제조학교실 ▲생약학교실 ▲식물학교실 등 7개 교실과 ▲분석연구반 ▲생약식물반 ▲약품화학반 ▲생물화학반 등 연구반이 운영됐다. 또 세계적 추세를 반영해 ▲생물화학 ▲물리화학 ▲이론약제학 ▲약효약 ▲기기분석학 등을 추가 채택했다.

100년사는 '70여 대의 현미경과 2000여 권의 도서를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다고 한다'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교수들은 휴강 없이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서술했다.

부산 피난처에서 찍은 약학대 학생들과 당시 학생증(출처; 서울대 약학대 100년사)
피난 시절 약학대 입학경쟁률 5.5:1...단과대 중 3번째로 높아

피난 시절이었으나 약학대 입학 경쟁률은 1952년 당시 5.5:1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는 국립서울대학교 단과대학 중 세번 째로 높은 기록이다.

한편 문교부는 1951년 2월 '대학생 징집연기 조치'를 발표해 학생의 군입대를 완화했다. 이공계의 경우 전면 입대 유보됐는데, 대신 각 대학에 배속장교를 두어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후 1951년 약대는 9월 29일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제5회 졸업식을 통해 18명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약학대학 졸업생이었다. 이후 52년 3월 6회 졸업생은 53명이 졸업했다.

100년사는 '51년부터 53년까지 전쟁에 필요한 군의관과 약제관을 양성하기 위해 약학대학 등에 재학하는 학생들의 징집이 연기되자 약학대 인기가 올라 입학시험 경쟁이 치열해졌다'며 '인기가 높아지자 1953년 2월 효성여자대학교, 중앙대, 숙명여대, 성균관대에 약학대가 설립됐고 1953년 4월에는 부산대 약학대 약학과가 설립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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