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약국에서 던지는 질문 하나가 뇌를 지킨다
- 데일리팜
- 2026-09-14 1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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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형선 한국푸드닥터교육원장(약사·한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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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카운터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매달 혈압약을 타러 오시던 어르신이었는데, 이번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오셨다. 처방전을 건네받으며 인사를 드리자, 어르신은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런데 그 대답이 조금 전에 이미 하셨던 말이었다. 딸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약사님, 요즘 엄마가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세요. 방금 드신 밥도 안 드셨다고 하시고… 이게 그냥 나이 드셔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병원에 가야 하는 걸까요?”
나는 그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골랐다. 약사에게는 익숙한 질문이지만, 딸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질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을, 얼굴을, 함께 보낸 시간을 언젠가 그녀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은 약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 삶 전체를 흔드는 질문이었다.
지난 회에서 나는 오늘날의 삶을 ‘생노병사’가 아니라 ‘생노병돌봄사’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돌봄의 시간 한가운데,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무겁게 자리 잡은 질환이 있다. 바로 인지기능의 저하,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치매다.
몸이 늙기 전에 기억이 먼저 늙는다
노화는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무릎이 먼저 아프고, 어떤 사람은 혈관이 먼저 좁아지고, 또 어떤 사람은 기억이 먼저 흐려진다. 그런데 유독 기억의 노화 앞에서 사람들은 더 크게 흔들린다. 관절이 아프면 걷는 것이 힘들어지지만, 기억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먹은 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자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전자는 불편이지만 후자는 상실이다.
경도인지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 MCI)는 바로 그 상실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시간이다. 일상생활은 대체로 유지되지만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또래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많은 사람이 “나이 들면 다 그렇지”라며 넘기지만, 경도인지장애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단계가 아니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경도인지장애를 가진 사람은 매년 5~10% 정도씩 치매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고되며, 60대 초반에는 유병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다가 80대에 접어들면 네 명 중 한 명꼴로 크게 늘어난다. 그러나 동시에, 경도인지장애는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생활습관과 식사, 대사질환 관리가 적절히 이루어지면 정상 인지기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제는 이 골든타임이 병원의 진료실보다 훨씬 더 자주, 훨씬 더 가까이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달에 한 번, 십여 분 남짓의 진료 시간 안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어제 저녁 식사와 어젯밤 수면의 질까지 물어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반면 약사는 다르다. 매달, 때로는 매주 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요즘 입맛이 어떠세요”, “밤에 잘 주무세요”라는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자리에 있다. 그 짧은 질문 하나가, 어쩌면 어떤 진단 검사보다 먼저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첫 번째 청진기가 될 수 있다.
식탁이 뇌혈관과 만나는 지점
뇌는 몸무게의 2% 남짓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섭취하는 에너지의 약 20%를 소비하는 대사적으로 가장 탐욕스러운 장기다. 그만큼 뇌는 혈류와 산소, 영양 공급의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뇌로 가는 혈관은 결국 심장에서, 심장으로 가는 혈액은 결국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뇌질환을 이야기할 때 심혈관질환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식사법이 ‘마인드(MIND) 식단’이다. 미국 러시대학교의 영양역학자 마사 클레어 모리스 교수 연구팀은 지중해식 식단과 고혈압 예방을 위한 대시(DASH) 식단의 장점을 결합해, 뇌 건강에 특히 유익한 것으로 알려진 식품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식사 패턴을 설계했다. 2015년 국제학술지 《Alzheimer’s & Dementia》에 발표된 이 연구에서, 마인드 식단을 철저히 실천한 참여자 그룹은 알츠하이머병 발생 위험이 뚜렷하게 낮아졌고, 흥미롭게도 식단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고 중간 정도만 실천한 사람들에게서도 위험도가 상당히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속 연구들에서도 마인드 식단을 잘 지킨 고령자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인지기능 저하 속도가 훨씬 완만했으며, 그 차이는 실제 나이로 환산했을 때 몇 년치의 노화 속도 차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핀란드에서 진행된 핑거(FINGER) 연구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이 연구는 식이조절, 운동, 인지훈련, 심혈관 위험인자 관리를 동시에 진행하는 다영역 생활습관 중재가 인지기능 저하 위험군 고령자의 뇌 기능을 실제로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준 세계 최초의 대규모 무작위 대조 연구로 평가받는다. 이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어느 한 가지 특효 식품이나 단일 성분이 아니라 ‘식사와 운동과 관계와 관리가 함께 갈 때’ 뇌가 지켜진다는 사실을 실증했다는 데 있다. 이 접근은 이후 여러 나라로 확장되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유사한 형태의 검증이 이어지고 있다. WHO 역시 치매 위험을 줄이는 방법으로 균형 잡힌 식사와 신체활동, 적정 체중 유지, 혈압·콜레스테롤·혈당 관리, 금연과 절주, 사회적·인지적 활동 등을 함께 제시한다.
여기에 더해 최근 학계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길목이 있다. 바로 장(腸)이다. 장내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짧은사슬지방산 등의 대사산물은 전신의 염증 반응과 면역 조절에 관여하며, 이 염증신호가 혈액뇌장벽을 넘나들며 신경염증과 인지기능 저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가 최근 여러 국제학술지에서 활발히 발표되고 있다. 장내 미생물 균형이 무너진 상태, 이른바 장내세균 불균형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된다는 보고도 이어지고 있다. 결국 우리가 매 끼니 삼키는 음식은 위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을 거쳐 혈관을 타고 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을 시작하는 셈이다.
근육이 빠지면 기억도 빠진다
임상 현장에서 약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신호가 있다. 바로 근감소증이다. 흔히 근육은 힘과 이동능력의 문제로만 여겨지지만, 최근 연구들은 근육량 감소와 인지기능 저하가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노쇠 과정임을 보여준다. 근육은 단순한 운동기관이 아니라 마이오카인이라는 신호물질을 분비해 뇌와 대사 전반에 영향을 주는 내분비기관이기도 하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의자에서 일어나기 힘들어지고, 악력이 약해지는 변화는 단지 다리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강의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치매를 예방하고 싶다면, 머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허벅지를 위해서도 단백질을 챙기셔야 합니다.” 씹는 힘이 약해진 고령자, 소화력이 떨어져 식사량이 줄어든 환자, 여러 만성질환약을 복용하며 식욕이 떨어진 환자일수록 단백질과 필수지방산, 비타민B군과 항산화 영양소가 함께 부족해지기 쉽고, 이 결핍이 다시 근감소와 인지저하를 함께 앞당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약국에서 던지는 질문 하나가 뇌를 지킨다
이론은 논문 안에 머물지만, 삶은 약국 카운터 앞에서 벌어진다. 나는 치매와 경도인지장애를 관리하는 데 있어 약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개입은 값비싼 건강기능식품을 권하는 일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믿는다.
“요즘 예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에 흥미가 없어지지는 않으셨나요?”
“식사량이 최근 눈에 띄게 줄지는 않으셨나요?”
“밤잠을 설치거나 낮에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지지 않으셨나요?”
“최근 들어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자주 잊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는 않으셨나요?”
이 네 가지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다. 식욕과 미각 저하는 영양결핍과 아연·비타민B12 부족의 신호일 수 있고, 수면의 질 저하는 뇌 속 노폐물 배출이 지연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으며, 반복되는 건망증은 경도인지장애의 초기 단서일 수 있다. 약사가 이 질문들을 습관처럼 건넨다면, 그 약국은 처방전을 조제하는 곳을 넘어 지역사회의 가장 가까운 인지기능 선별창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원칙이 있다. 푸드닥터로서의 음식 상담은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인지저하가 의심되는 신호가 확인되면, 지체 없이 신경과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로 연결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음식과 영양 관리가 담당하는 역할은 약물치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단 이전의 위험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진단 이후에는 약물치료의 효과가 환자의 일상에서 온전히 발휘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항응고제나 인지기능 개선제를 복용하는 환자가 특정 건강기능식품을 무분별하게 병용해 상호작용 위험에 노출되는 일을 막는 것 역시, 오직 약사만이 정확히 해낼 수 있는 임상적 역할이다.
그녀는 오늘도 딸의 이름을 부른다. 그날 약국을 찾았던 어르신은 몇 주 뒤 신경과 진료를 거쳐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아주 이른 단계였다. 나는 그 어르신과 딸에게 거창한 처방 대신 아주 작은 것들을 권했다. 매일 저녁 식사에 등푸른생선이나 견과류, 청국장 등을 조금씩 더할 것, 흰쌀밥의 절반을 잡곡으로 바꿀 것, 오후에 십 분이라도 햇볕을 쬐며 걸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한 번은 딸과 함께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할 것.
몇 달 뒤 딸이 다시 약국을 찾아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엄마가 저랑 반찬 투정을 하세요. 예전엔 그것도 다 잊으셨었는데.” 반찬 투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직 어머니의 삶에 감정이, 취향이, 관계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이 어떤 임상 지표보다 반가웠다.
치매는 여전히 완치가 없는 질환이다. 그러나 그 진행을 늦추고, 그 시간 속에서도 존엄과 관계를 지켜내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최전선은 신경과 진료실만이 아니라, 매일 세 번 차려지는 식탁과, 그 식탁 앞에 앉기 전 약봉투를 받아드는 약국의 카운터이기도 하다.
다음 회에서는 경도인지장애와 치매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약사가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영양 상담의 구체적인 원칙과, 다약제를 복용하는 고령 환자에게서 특히 주의해야 할 약물-영양 상호작용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식사와 대화와 관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야 한다.
치매가 온 뒤 우리는 환자에게 수많은 것을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 사람이 아직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무엇을 해주었는가? 의학 3.0 시대의 약사는 질병이 완성된 뒤에만 만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위안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에서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약사다.
*참고문헌*
*Morris MC, Tangney CC, Wang Y, Sacks FM, Bennett DA, Aggarwal NT. MIND diet associated with reduced incidence of Alzheimer's disease. Alzheimers Dement. 2015;11:1007-1014.*
*Morris MC, Tangney CC, Wang Y, Sacks FM, Barnes LL, Bennett DA, Aggarwal NT. MIND diet slows cognitive decline with aging. Alzheimers Dement. 2015;11:1015-1022.*
*Ngandu T, et al. A 2-year multidomain intervention of diet, exercise, cognitive training, and vascular risk monitoring versus control to prevent cognitive decline in at-risk elderly people (FINGER): a randomised controlled trial. Lancet. 2015.*
*Gut microbiome, immune modulation, and cognitive decline: insights on the gut-brain axis. Front Immunol. 2025.*
◆ 필자 소개
한형선 박사는 오랜 기간 음식과 건강의 관계를 연구해 온 음식치유 전문가로, 현재 한국푸드닥터교육원 원장을 맡고 있다. 음식이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인체의 회복력과 건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음식치유와 식생활 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경도인지장애와 치매 예방, 뇌 건강을 위한 식생활 관리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강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약사 및 음식치유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저서로 『한형선의 푸드닥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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