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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제, 리베이트 그리고 김대리

  • 어윤호
  • 2014-07-11 06:14:59
  • 내러티브| 영업사원의 일상에 비친 삶의 무거움

[AM 08:25 영동대로, OO제약 사옥]

"젠장, 꼭 술 마신 다음 날 본사 소집이야!"

머리는 지끈거리고 길은 막힌다. 사내공지를 확인 안 한 내 잘못도 있지만 우리 팀장은 꼭 전날 밤이 돼서야 본사 출근 소식을 알려준다.

늦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뛰었다. 엘리베이터도 각 지역 영업사원들 덕에 만원이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멀대 같이 큰 팀 막내가 보였다.

"김대리님 오셨습니까?"

"어. 근데 오늘 뭔 일인데 소집이냐?

"모르셨어요? 저기 앞에 써 있지 않습니까. 흐흐..."

후배 말에 고개를 돌렸다. 'OO제약 윤리경영 선포식'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제서야 리베이트 투아웃제 관련 행사를 진행한다는 내용의 팀장 문자가 생각났다.

"정부가 리베이트 투아웃제 도입을 통해 강력한 리베이트 근절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회사 역시 이제는 철저한 윤리 경영을 실천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절대,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해서는 안되며…."

어이가 없다. 우리가 언제 회사에서 하지 말라는데, 자청해서 리베이트를 뿌렸나? 연초에는 회사에서 지급한 법인카드, 일비 등을 리베이트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아 가더니, 이제는 선포식이다.

정부도 웃긴다. 영업사원 개인의 리베이트도 앞으로는 회사의 리베이트로 간주한다고? 당연히 영업사원의 리베이트는 대부분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다. 간혹 심한 실적압박에 시달리는 경우나 매출 극대화를 위해 인센티브 일부를 투입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야말로 극소수다. 역류하는 위액 덕에 짜증이 배가 된다.

"야, 끝났다. 과장님 모셔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PM 02:00 마포구 **당구장]

팀원들과 식사를 마치고 담당지역으로 넘어왔다. 거래처 방문 전 준비운동(?)은 역시 당구가 최고다. 상대 역시 게임비를 내기 위해 당구를 배운 듯한 나의 전 회사 동료 최씨, 금상첨화다.

난구를 맞은 나의 정신집중을 훼방하기 위해 최씨가 말을 건냈다.

"너네 회사는 분위기 어떠냐? 난 이제 앞길이 막막하다. 수익 확 줄게 생겼어."

"뭐, 투아웃제 말하는건가? 글쎄, 우린 잘 모르겠네. 근데 왜 니 수익이 줄어? 아아, 그렇네."

친한 동료이긴 하지만 왠지 이쪽(?) 얘기는 좀 꺼려진다. 그런데 김씨의 수익 얘기는 공감이 갔다. 최씨의 회사는 '쁘로(처방액 대비 일정 비율로 제공되는 리베이트를 가리키는 은어)'를 준다.

영업사원이 회사에서 자금을 공급받아 거래처에 제공하는 전통적인 방식인데, 많은 영업사원들이 여기서 일종의 커미션(?)을 뗀다. 가령 회사에서 인정하는 해당 거래처의 쁘로가 30%라면 이를 20%로 협상해 나머지 금액을 챙기는 식이다.

우리회사의 경우 영업사원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윗선에서 우량 거래처를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김씨와 같은 소득은 발생하지 않는다.

생각이 많아지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당구계의 기부천사 최씨에게 패배했다. 오늘 왠지 일진이 사납다. 이대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몇달째 공들인 원장과 겨우 잡은 미팅이 오늘이다.

[PM 04:30 홍대 부근 ##내과의원]

"어 그래, 어서와. 여기 앉아."

의사들은 초면에도 참 반말을 잘한다. 이렇게 친근하게 대해 줄 거면서 석달을 안 만나준 것인가?

"네. 원장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저희 회사 소개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요새 항생제도 꽤 괜찮고 거담제 쪽도…"

오랫만에 잘 쓰지 않는 '영혼 충만 전문지식 디테일 기술'을 시전했다. 요새는 일단 처음 접근은 이렇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요 그래. 그건 그렇고, 이쪽은 뭐 따로 제안 같은 거 없나?"

약은 쥐똥 만큼 쓰면서 생색은 엄청나다는 소문이 맞는 듯 하다. 만난지 3분 만에 돈얘기를 꺼낸다.

"네. 원장님. 그런데 요새는 리베이트 투아웃제 시행이다 뭐다해서 업계 분위기가 많이 안 좋습니다. 아까 말씀드렸 듯, 일단 저희 품목 품질은 믿을만 하니, 한번 써보시고…"

"아, 투아웃제? 내가 거래하는 어디는 상관 없다던데? 그거 처벌이 해당 품목을 퇴출시키는 거라면서? 적당히 버려도 상관없는 제품으로 돌릴 수 있다고, 나보고 걱정 말라고 하던데?"

정말 도가 튼 회사다. 제도가 나온지 얼마나됐다고 벌써 해법을 연구하고 있나 보다. 쁘로에 대한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한 난 ?겨났다.

오늘 하루종일 리베이트 투아웃제가 주위를 맴돌았다. 얼마나 제대로 된 제도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제발 쓸데없이 영업부만 괴로워지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귀갓길이 지치는 저녁이다.

[이 글은 다수 제약사의 영업사원들을 취재해, 사례를 한데 묶어 재구성한 것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회사는 특정 회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제약업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부여한 것 역시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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