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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섬유증 앓게 된 어르신의 '전화'

  • 어윤호
  • 2013-06-07 06:34:52
  • 70명 규모 커뮤니티서 6번째 사망…신약 출시, 절박한 '생명줄'

하덕봉 골수섬유증 환우회 대표

하덕봉 골수섬유증 환우회 대표
오후 다섯시, 휴대폰이 울린다. 한창 내일자 기사 마감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터라 귀찮음이 밀려온다.

"기자 양반, 내가 인터뷰 끝나고 가는 길에 또 한분의 환우가 하늘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오."

낮에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 환우회 대표를 맡고 있는 어르신이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 있다.

"그냥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전화해 봤어요. 기사 잘 부탁합니다. 이만 끊겠소."

잠시 일을 멈추고 나와 담배 한대 피워 물었다. 전화 받기가 귀찮았던 것이 미안해서 였을까. 들숨이 깊어졌다. 어르신이 들려준 얘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덕봉. 올해 만 65세, 그는 오랜 세월 법무사무소 사무장으로 일했다고 했다.

혜화역 근처 한 카페에서 그를 맞았다. 인사하며 건넨 내 명함을 쥐어든 어르신은 사무장 시절 명함을 내밀었다. 초여름 날씨에도 타이까지 매고 갖춰 입은 양복, 정갈하게 빗어 넘긴 은발머리에서 법조계 출신의 자부심이 보인다.

골수섬유증, 어르신이 앓고 있는 희귀암의 병명이다. 말 그대로 골수가 섬유화되는 질환인데 혈구 생성에 오류를 일으켜 비장비대 등 중증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예후가 좋지 않고 치료방법이 거의 없어 골수섬유증 환자들의 남은 생은 5~7년에 불과하다. 이번 인터뷰는 이 병의 첫 표적치료제( 자카비, 성분명 룩소리티닙)의 국내 허가를 계기로 이뤄졌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유형의 인터뷰는 아니다. 환우회는 당연히 신약이 나오면 급여등재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약에 보험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재정, 약효, 대체요법.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다. 맹목적으로 환자들의 말만 들어 줄 수 없는 상황이 부담을 주는 탓이다.

게다가 애초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제약사들을 상대로, 시쳇말로 '간'을 보며 정치적으로 변해가는 일부 환우회 대표나 임원들을 보면서 짜증까지 올라왔던 요즘이다.

다짜고짜 물었다. "노바티스(자카비 개발 제약사) 쪽과는 자주 보십니까?"

"응? 나는 그 양반들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제약사와 만나본 적도 없다.' 의외의 대답에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르신은 현재 어느 정도 질환 관리가 되는 환자였다. 당장 신약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환우회 규모도 무척 작았다. 현재 회원수가 약 70명. 보호자와 환자를 합한 수치다. 흥미가 생겼다. 이것 저것 준비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어르신은 4년 전 골수섬유증 진단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아무리 인터넷에 검색해도 병이나 약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10년에 혈액암협회에 가입하면서 약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지난해 7월 협회와 논의를 통해 커뮤니티 형태로 환우회를 만들었다.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습디다. 심지어 의사 선생들 끼리도 얘기가 달라. 내 앞에서 의학사전을 찾아 보는 선생도 있었다니까. 근데 이 얘기는 기사에서 빼줘요. 선생들 화 내는거 아닌가 몰라."

쓴 웃음이 났다. 희귀암 환자는 아픈데 의사들 심기까지 살핀다. 사람이 그렇듯 좋은 의사도, 나쁜 의사도 있다.

보건의료 전문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전공 진료과목 분야에 출시된 신약의 이름도 모르는 교수나 개원의들도 숱하게 봐왔던 터라,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만 골수섬유증은 워낙 희귀하고 한국에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질환이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란 생각에 걱정할 필요 없다고 어르신을 다독였다.

"근데 진짜 문제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거요. 골수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는 하는데 이게 비용도 만만치 않고 합병증이 장난이 아니라오. 환우회 만들고 다섯명을 떠나 보냈는데 그 중 셋이 이식술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내 잘못이었다. 맞다. 골수섬유증 환자는 대부분 고령이다. 치료법이 있다고 해도 수술에 적합한 컨디션을 갖춘 환자 자체가 적을 것이고 수술을 받아도 합병증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저그런 인터뷰로 생각해선 안 됐다. 그들에게 자카비의 출현은 치료옵션의 '추가'가 아니라 '탄생'이었다.

골수섬유증은 10년 내 급성백혈병으로 전환되고 급성으로 전환되면 3개월 이내에 사망한다. 여기에 타 혈액암과 마찬가지로 비장비대를 동반하는데, 이를 조절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비장절제술, 수혈, 항암치료(BMS 하이드리아) 등으로 이를 조절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증적 치료에 불과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카비의 승인이 이뤄진 것이다. 이 약은 골수섬유증 환자의 97%에서 비장비대를 감소시켰고 현존하는 최적의 치료(BAT)와 비교해 생존기간을 연장시켰다는 임상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제 당연히 문제는 급여등재다. 어르신은 얼마나 험난한 줄다리기가 남았는지 알고는 있을까?

물론 어르신은 우리나라 약가등재 절차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무장 출신 다운 행정력을 발휘했다.

"고통받고 있는 우리 환자들을 위해 자카비를 빨리 보험 적용 시켜달라고 복지부와 심평원에 탄원서를 냈답니다. 해당 공무원들이랑 통화도 하고 했는데, 어떻게 잘 됐으면 좋겠는데…."

조금 설명을 드리고 싶어졌다. "대표님 근데,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제도 특성상 정부랑 협상을 통해 급여 여부와 약가가 결정됩니다. 정부의 의지만 필요한 게 아니라 제약사의 의지도 중요하단 얘기죠."

"그래요? 그럼 제약사도 좀 환자들 위해서 양보할 건 해줬으면 좋겠구려. 환우회 사람들이 언제 자카비 먹을 수 있냐고 엄청나게 물어 와요. 정부랑 제약사가 환자들 고통을 꼭 알아줬으면 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배웅하는 동안에도 어르신은 쉴새 없이 치료제가 필요하다고 거듭 말했다. 한참 후에야 양복 저고리를 챙겨 두르고 오후에 환우 한명을 만나기로 했다며 나섰고 이날 사망소식을 들었다. 한 명의 사망례가 더 나왔으니 환우회 출범 이후 사망자는 이제 여섯명이 됐다.

자카비의 등재가 이뤄질지, 새롭게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희귀질환 문제에 접근할지, 노바티스가 생각하는 마지노선이 어느정도인지, 자카비가 실제 얼마 만큼의 효능을 발휘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치료제'라 부를 수 있는 약이 없다는 것은 누가봐도 절망적이지 않은가.

"우리 마누라는 나보고 이거(환우회) 하지 말래요. 내 몸이나 잘 챙기라고. 그래도 그럴 수 있나. 나는 그나마 건강한 편이야. 꾸준히 운동하고 관리해요. 원래 많이는 안되는데 요샌 등산하고 내려와서 막걸리도 한잔 먹는다오. 하지만 다른 환우들은 꿈도 못꿔. 아 참, 막걸리 얘기도 아내가 싫어하는데 허허…."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는 길, 어르신의 농담 섞인 푸념이 맴돈다. 막걸리 한잔 생각이 간절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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