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동안 3대째 한 자리서 약국 운영"
- 노병철
- 2008-03-15 06: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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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냉천동 활명당약국 가업 잇는 조경래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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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242번지에 소재한 ‘활명당약국’.
1919년 고 조용원 씨가 ‘활명당약방’으로 개업한 이후 아들인 고 조영제 약사가 그 맥을 이어받고 현재는 손자인 조경래 (활명당약국·60)약사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 약업사를 보면 최초의 ‘매약방(賣藥房)’은 1897년 서울 순화동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전신)’을 들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3대째 약사가업을 잇고 있는 약국을 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활명당약국은 같은 장소에서 90년 동안 '사랑의 약손'역할을 펼쳐오고 있다.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지…. 할아버지께서 동경으로 떠난 이유 말이야. 동경약학교를 졸업 후 국내로 건너와 1919년에 지금 이 자리에 ‘활명당약방’을 세우고, 매약방을 시작하셨어. 그 후 아버지께서 경성약전을 졸업 후 정식으로 약국을 개업한 년도가 아마 1943년도쯤으로 기억해.”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운영하던 약방은 대부분 ‘한약(韓藥)’이었으나 활명당약방 창업주인 고 조용원씨는 주로 ‘양약(洋藥)’을 취급했다.
당시 활명당약방의 하루 매출은 15원 정도로 쌀 한가마 값에 달했다. 그때의 국민총생산량(GNP)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큰 외형을 자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직후 활명당약국은 자체 제작한 약을 판매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두꺼비고약’이 그것. ‘와셀린’에 ‘붕산’을 혼합해 제조한 이 약은 곪은 상처에 특효가 있어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 곳에서만 90년 동안 약국을 운영하다보니, 40년 이상 된 단골손님도 종종 조경래 약사를 찾아와 ‘활명당약방’ 시절의 추억을 회고하기도 한다.
“단골손님들? 깊은 인연이지…. 아니, 어쩌면 나에겐 친부모님과도 같이 소중한 분들이야. 이제는 그분들도 기력이 쇠해져 예전처럼 약국을 자주 찾지 못한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야.”
3대째 약사가업을 이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팀목이자 이유에 대해 조경래 약사는 “증조부의 순교정신과 할아버지의 생활철학”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약사라는 가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었던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는 ‘아픈 사람들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라’며 늘 말씀하셨거든.”
1919년 활명당약방을 시작으로 지금의 ‘활명당약국’까지, 9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곳을 찾은 수 많은 사람들은 표면적인 ‘약’ 이상을 넘어 ‘약손’이라는 사랑과 정성까지도 전해 받지 않았을까?
‘90년 전통의 맥’을 이어온 활명당약국은 이제 조경래 약사를 끝으로 세상을 향한 '사랑의 약손'이 막을 내릴 상황이다.
“물론, 아쉽지…. 할아버지, 아버지께 죄송스럽기도 하고.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그래도 난 다시 태어나도 약사의 길을 걷고 싶어. 그게 바로 내 ‘숙명’이야.”
약사를 천직으로 받아들임은 물론 "다시 태어나도 약사의 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조경래 약사.
이렇게 말하는 그의 말 속에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오늘도 ‘사랑의 약손’을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의약인들의 마음이 투영돼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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