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의 만성질환으로 식후에 한움큼의 약을 드셔야 하는 환자들.
약만 먹어도 배부르겠다..안됐다 생각했습니다.
내 가족이 아프기 전 까지는요.
종합병원 조제실에서 바쁘게 입원환자약, 퇴원약을 조제하고 밤을 새워가며 응급환자약을 조제하면서,
약사인 저에게 어느새 ‘약’은 조제해야 하는 ‘일감’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가족이 아프기 전 까지는요.
무균조제실에서 무균복을 입고 장갑을 끼고 항암제를 조제, 믹스하면서
항암제는 내손에 묻거나 얼굴에 튀어서는 절대 안되는 ‘무서운 약’ 이였습니다.
내 가족이 아프기 전 까지는요.
두군데 이상 전이된 암을 갖고 계시면서 이미 여러 치료로 심신이 쇠약해진 환자에게
새로운 임상시험약을 투약하겠다는 보호자들.
의미없는 치료로 환자를 힘들게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가족이 아프기 전 까지는요.
부러웠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가득하신데,
더 이상 치료약이 없어 진통제만 맞고 있는 내 가족 옆에서 배부르리만치 많은 약들을 한입에 드시는,
그 치료약이 있는 만성질환 환자분들이요.
부끄러웠습니다.
힘들고 괴롭지만 삶에 대한 의지로 항암제를 투약하는 내 가족을 보면서,
그 약이 조금이라도 내 몸에 묻으면 큰일 날 것처럼 안달했던 내 모습이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환자에게 새로운 임상시험약을 투약하는 건
꼭 병이 나으리라는 기대는 아니라는 것을.
힘들고 지치지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가족의 바램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환자의 바램으로 잡게 되는 지푸라기 같은 것 이라는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조제해왔던 것은 ‘일감’도 ‘무서운 약’도 아니고,
단 한 알의 작은 것일지라도 ‘약’이였다는 것을.
‘약’이란 아픈 환자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을.
배부르리만치 많지만 내 병이 나아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
아프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
내 소중한 삶을 조금 더 지속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
나는 ‘희망’을 조제하는 대한민국의 ‘약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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