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님한테 조제 받으면,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을 최상의 서비스로 대접받는 기분이에요.”
방금 조제한 약을 복약지도하고 건네는데, 60 초반의 여성 환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약사로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다 날아갑니다. 의약분업 이전에는 종종 듣던 말을 10년 넘어 다시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의약분업 이전에는 철마다 동지엔 팥죽, 설날엔 가래떡과 떡국, 정월 대보름엔 오곡밥 나물 부럼, 이른 봄날엔 갓 나온 쑥을 뜯어 만든 쑥 개떡, 한여름 무더위에는 시원한 콩국수와 복날엔 삼계탕, 추석엔 송편을 바리바리 챙겨 주시는 환자분들이 꽤나 많았지요.
약국 직접조제로 환자들과 소통이 활발했습니다. 대도시지만 남의 집 가정사는 물론 심지어 아무개집 수저가 몇 벌인가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환자들과의 감정 교류가 위에 예시한 이바지 문화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실력 있고 다정한 약사는 환자들이 기다려 주고 선택해 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재레드 다이마몬드가 말하는 ‘어제까지의 세계’ 즉 전통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처방전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한 약사들 간의 경쟁은 치열해 졌고, 환자들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의약분업 시행이 행복 끝 불행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론 문전약국 약사님들은 “무슨 말이냐, 의약분업이 돼서 얼마나 좋은데.”하며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행복 불행은 경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마음 문제겠지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에 대부분 가기 싫어합니다. 자율성이 없기 때문이고 복종해야 하는 을의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약분업 이후 대한민국 약사들이 불행한 건, 약물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고 의사에 종속되고 환자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의약품 선택권이 없고 환자들과의 감정교류가 없는 의약분업하의 약국 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즐거울 리 없습니다.
여전히 환자들의 약을 정성스럽게 조제하고 복약지도해 주지만, 주변 약국이 조제료 할인해 준다고 가고, 다른 약국은 다 주는 서비스 음료수 한 병 안준다며 가고, 대기 환자 두 세 명만 있어도 오래 기다리기 싫다며 가는 환자들에게 제 마음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없다 보니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환자를 대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환자들의 고통에 내가 아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2009년 7월30일 오전에 동네 의원 검진센터에서 일상적인 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을 받고 오후에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내시경 검진 결과 진행성 위암(3~4기) 같다며 자세한 것은 일주일 후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한다는 담당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멀쩡한 내가 무슨 드라마나 영화의 비련의 주인공도 아닌데 왜 하필 나에게 ?
제이미 제파에게 부탄에서의 여행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었고, 꾸뻬씨의 여행이 행복을 찾기 위함 이었다면, 진행성 위암을 통보 받고 가족 모르게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떠나야 하는 제주도 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행이 아니었을까?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 벌을 받는 걸까? 아님 어쭙잖은 정의감에 불타 불의를 단죄한다며 설쳐댄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 분회장, 부지부장, 지부감사 등을 역임하며 표준소매가격 단속으로 100 곳도 넘는 약국을 처벌하고 수많은 면대업소를 문 닫게 해 그들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으니 내 눈에도 피눈물 나게 하려는 것인가 보다.
아님 “내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는 게 제일 큰 공부여”라는 보성스님의 말을 무시하고 날마다 하루 다섯 시간 정도만 잠을 자며 막행(莫行)을 저지른 대가라고 뒤늦게 자책했습니다.
일주일 후 혹시나 오진이길 바라며 기다린 조직검사 결과도 악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으라는 의사의 말에 주변을 수소문하여 대학병원의 국내 위암 수술의 최고 권위자 중 한명을 추천받아 예약 날짜를 잡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 병원 예약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서둘러 대학병원에서 검사 받고 똑같은 결과를 통보받은 날이 8월28일, 수술은 한 달 뒤로 잡혔는데 이 때 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음식을 먹기 무섭게 토하거나 설사를 해, 불과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7kg이나 빠지니 완전 병색이 완연한 환자 몰골로 변하게 되더군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가는 몸 상태로는 수술 날짜까지는커녕 도저히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물 한모금도 못 마시고 토하자 비로소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미련이야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큰 애착은 없었습니다. 다만 큰 아들이라고 제게 모든 희망을 걸고 계신 노환의 어머님과, 대학에 재학 중인 두 딸과 집사람 등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직은 좀 더 울타리가 돼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지긋 지긋한(?) 약국을 미련 없이 접고 깊은 산 속으로 요양할 곳을 알아보았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들 말합니다. 노환의 어머니가 제 능력으로도 어찌해보지 못했던 수술 날짜를 3주 이상이나 앞당겨 오신 것입니다.
2009년 9월은 신종 플루가 한참 기승을 떨치던 때였습니다. 9월 8일의 수술을 위해 9월6일 입원하기 위한 짐을 챙기고 응접실에 앉아 명상에 잠겼습니다. 다시 내가 집에 돌아 올 수 있을까? 집안 구석구석 손 떼 묻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마음 속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9월8일 위 유문부위 70%를 잘라내고 남은 분문부위 30%와 십이지장을 연결하는 ‘위십이지장 문합술’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소문은 당사자만 모르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잘라낸 위를 저는 보지 못하고 제 식구들은 모두 보았습니다. 잘라낸 위를 잘게 절편 하여 정밀 조직 검사를 하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오게 됩니다. 9월15일 아침 회진을 위해 먼저 들어온 레지던트 선생님은 정밀조직검사 결과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T1,N0,M0
와우~ 세상에나! 로또에 당첨된들 이 보다 더 기쁠까요?
암세포가 점막층이나 점막하층에 국한되었다는 말(T1)이고, 위 주위 림프절 전이가 전혀 없다는 말(N0)이며 원격전이가 없다는 뜻(M0)입니다. 한 마디로 최소 3기 내지 4기라고 진단 받아 수술했는데 정밀 조직 검사 결과 1기로 판정을 받아 항암치료 등 일체의 치료가 필요 없고 앞으로 최소 5년은 각별히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주치의 선생님조차 결과를 믿지 못해 재차 확인해 보시고는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했나 보다.”라고 기뻐해 주시더군요.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암에 걸렸나 보다.”라고 생각할 땐 언제고, “음,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 못 믿을 것이 사람 마음인가 봅니다.
6인 입원실에 같이 있던 환자들이 자신들은 1,2기로 진단 받고 수술 후 3,4기로 판명되었다며 대부분 자신들의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부러워하더군요. 식구들은 차치하고라도 정말 많은 약사님들의 수술 전후 격려와 성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9월17일 퇴원하고 집 응접실에 앉고 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때부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기 물 산 바다 바위 나무 풀잎 하나까지 생명체건 무생물이건 다 소중하고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져 지긋지긋해 하던 약사로서의 일과 역할이 못 견디게 그리워집니다.
퇴원 후 한 달여 만인 10월20일, 비록 체중은 검진 전에 비해 13kg이나 줄고 체력도 형편없었고 신종 플루도 유행이었지만 오후만이라도 약국을 보기 위해 출근을 시작합니다. 암 진단 이후 경황이 없어 약국에 관심을 쓰지 않은 모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휴가철 폐장이후의 해변 가 같은 썰렁함이랄까.
우선 어둡고 침침한 약국 분위기를 바꾸어야 했습니다. 조명 공사를 통해 형광등을 새로 달고 페인트를 사서 일요일에 집사람과 약국 벽과 천장을 새로 도색했습니다. 듬성듬성 비어 있던 일반의약품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초록빛이 싱그러운 아이비와 액운을 몰아낸다는 겨울 꽃의 여왕인 시클라멘을 곳곳에 코디해 놓았습니다. 2010년 2월 하순부터는 근무약사 없이 전일 근무하며 봄의 전령사인 샛노란 프리지아, 노란색과 핑크색의 카란코에 자매, 아이보리와 빨간색 게 발 선인장, 형형색색의 철 이른 장미를 배치해 놓으니, 환자들이 그러더군요. “약국이에요? 화원이에요?”
스턴버그 박사는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란 그의 저서에서, “왜 창밖으로 숲이 내다보이는 병실의 환자는 벽돌담이 보이는 환자보다 진통제를 덜 복용할까? 도시를 메운 빌딩들에 푸르른 자연을 더하면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이유가 뭘까?”라는 의문에 우리가 어떤 공간, 어떤 장소에 있는지에 따라 우리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며 ‘감각’이 우리를 ‘치유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공간 변화와 함께 약사와 약국의 청결이 중요합니다. 어떤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고 싶으면 화장실을 가보라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유명한 음식점이라도 화장실이 더러운 곳은 두 번 다시 가지 않습니다. 화장실이 더러운데 음식이 정갈할 리가 없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씩 약국 구석구석 비로 쓸고 걸레질을 합니다. 약국 유리창도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매일 닦습니다. 바닥에 먼지 하나 없습니다. 판매대 위의 물건들은 매일 먼지흡수 털이개로 먼지를 제거합니다. 면역 기능이 약해져 있다 보니 청결 조제를 떠나 제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손의 청결에 무척 신경을 씁니다. 늘 손톱은 짧게 하고 수시로 손을 씻고 더 자주 손 소독을 합니다. 그 손으로 조제를 하고 하나하나 조제 약물을 짚어 가며 설명을 해줍니다. 어떤 여성 환자들은 설명해 주는 약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 손만 봅니다. 그리곤 칭찬인지 흉인지 모를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무슨 남자 손이 이렇게 작고 예뻐요?” “무슨 남자 손이 이리 곱누” 그러니 불결 조제에 대한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드웨어를 바꾸고 난 다음에 소프트웨어를 바꿨습니다. 바로 약사의 마음가짐입니다. 영수증을 버려 달라면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두 말없이 받아 버려줍니다. 다른 약국 다 주는데 서비스 음료수 왜 안 주느냐는 환자들에겐 인상 쓰는 대신 약은 물로 복용하는 것이 제일 좋다며 말해줍니다. 박카스 한 박스를 비닐 봉투에 넣어 줄땐 박스 네 귀퉁이를 각을 죽여 넣어 주고, 부피가 큰 약봉투도 두 귀퉁이를 접어 비닐 봉투에 넣어 줍니다. 그러면 절대 비닐이 찢어지지 않아 들고 가다 낭패를 당하지 않습니다.
향정약이나 덕용 포장에서 꺼내 주는 약들은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계수기에 펼쳐 넣고 일일이 세어 숫자를 확인시켜 줍니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먹고 있는 도중에 조제 환자가 와도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음 ~ 점심 식사 값 벌었네.” 긍정적인 생각이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환자가 많아 정신없이 바쁘면 돈 벌어 좋고, 환자가 없어 한가할 땐 책을 볼 수 있으니 좋습니다. 꽃값과 책값이 많이 들지만 술과 담배를 안 하니 집사람에게 바가지 긁힐 일도 없습니다. 아니 가끔씩 실속 없이(?) 약사회무 때문에 파트타임 약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 바가지 긁히긴 하지만, 골프 안치고 아주 오래된 중고차 바꿔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돈 핑계로 바가지를 긁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직 암 등록환자로 투병중인, 조금만 피곤해도 구순포진이 생기는 저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회무활동은 제가 가장 힘이 들었던 순간에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약사님들과 약사회를 위한 조그마한 보답이지요. 아울러 ‘위기의 시대에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라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백척간두에 처해있는 약사회에 조그만 힘이더라도 보태는 것이 회원으로서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내면이 명품인 사람은 겉모습을 명품으로 꾸미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듯이, 약사로서 갑의 내공이 갖춰져 있다면, 얼마든지 환자들에게 을의 대접을 받아도 서운치 않습니다. 아니 환자들에게 진정한 갑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환자들이 약사들에게 진정성을 느끼면 어쩌다 조제 실수가 나온다고 해도 웃으며 말합니다. “ 어머, 약사님! 여기 알약 하나가 빠졌네요.” 똑 같은 처방으로 약을 복용하는데도 “여기 약을 먹으면 잘 낫는다.”고 듣기 좋으라고 말들 하십니다.
몽테스키외는 풍요는 물질적 부(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고 했지만, 진정한 풍요는 마음 비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량한 자존심 버리고 욕심 줄이고 나니 삶이 풍요롭게 느껴집니다.
모든 사람의 비난이나 칭찬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비난도 칭찬도 다 뜬 구름입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 할 필요 없고 한 결 같이 제 갈길 가면 됩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첫 걸음입니다.
진정성 있는 제 마음을 환자들에게 주고 나니 10년 동안 끊겼던 이바지 음식 문화가 재연되더군요. 그리고 약사로서 환자에게 들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약사님한테 조제 받으면,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을 최상의 서비스로 대접받는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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