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4일은 제가 약국을 개설한지 20년이 되는 날이였습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고 하는데, 지난 20년 동안 약국 현장을 둘러싼 주위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
제가 약사가 되고자 했던 것은 1급 지체장애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그래도 약사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또는 경제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란 생각에서 힘든 약대 학창시절을 이겨내고 졸업하여 약사가 되었습니다.
졸업 후 저의 장애 환경에 알맞은 근무처를 구하지 못해 몇몇 아는 선배약사의 약국에서 기본적인 조제만 배우고 나서 1년 후 개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적합한 마땅한 개국 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던 중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응답으로 얻은 자리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맞은편에 있는 자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목은 좋은 자리인데……. 잘 되려나?!’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때는 약국의 춘추전국시대라 불릴 만큼 동네 곳곳에는 약국이 포화 상태이었습니다.
바로 길을 건너면 몇 년째 약국을 해온 실력 있는 약사님들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 제가 약국을..... 그것도 하는 장사마다 잘 되지 않아서 매년 점포 주인이 바뀌는 그러한 곳에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병아리 약사)가 개업을 한다는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떠오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1994년 7월4일 대망의 약국을 개설
하지만 이제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인도하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거라는 담대함 속에 그렇게 겁 없이 1994년 7월4일 대망의 약국을 개설하였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나의 부족함과 모르는 것을 채우기 위한 일념으로 한 가지씩 공부를 하면서, 또 약을 상담하고, 팔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배워가게 되었습니다.
배움의 열의로 양병학과 한방강의 수강
그 당시 약국 한방이 활기를 띠던 시절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는 게 힘이라고 선배약사를 따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배움의 열의로 한방강의를 들으러 다녔는데, 첫날 강의실에 들어 간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세 있으신 분들을 비롯해 수많은 약사님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며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약대를 졸업하여 조제를 배우고 약만 팔면 약국이 잘 운영되는 줄 알았는데, 그때의 신선한 충격으로 나도 더 배우고 공부하는 약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의 불편한 신체 여건상 배움이 허락된 것이 한정되어 있어서 양병학, 그리고 한방을 우선적으로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배우고 온 날은 배운 내용이 바로 적용될 수 있는 환자분들이 약국을 방문하였으며, 그렇게 투약해 가면서 조금씩 더 알아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터넷이 없었던 그 시절은 환자분들이 약사가 모든 것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해 상담하고 투약을 해 가는데,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배움이 필요했습니다.
세금감면 혜택을 위해 금전등록기마련
그렇지만 약국이 생각하던 것처럼 늘 편안하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개국했을 당시 금전등록기를 설치해 환자들의 영수증을 6개월만 뽑아주면 세금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금전등록기 값도 뽑고 남는다고들 하여서 27만 원짜리 기기를 새것으로 장만했는데, 그 정책이 6개월 후 폐지되어서 세금감면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하고, 금전등록기마저 고물상에 넘어 갔습니다.
1996년 개업 2년 후 한약 분쟁
개업 2년 후 약국 가에는 한의사와 한약 조제 분쟁이 벌어져 약사들이 한약조제 인증시험을 치러야했고, 그 인증시험에 대비한 강좌가 개설되어서 또 그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를 납득할 수 없는 약국 가에서는 평화시위로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동안 약국내 모든 불을 끄고 촛불만 켜놓고 약을 파는 촛불 시위를 벌렸는데 저 또한 동참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아득한 추억이네요.
졸업한지 한참 되신 분들도 고려해서인지 인증시험은 다행이 예상문제 내에서 평이한 수준으로 출제되었지만, 그 시험을 보러온 수많은 약사님들(그중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 임산부를 포함)을 보면서 졸업하면 더 이상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상황에서 졸업하고 또 약사로서 살아오면서도 국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저렇게 고생하며 인증을 확인받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저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1998년 도둑과 부도수표
1998년 새해, 그때는 1월 1~3일이 연휴인 시절입니다. 우리 약국은 동네약국이라 공휴일이어도 2일부터 문을 열었고 겨울철이라 감기 환자로 찾는 사람들 수가 평소보다 배로 많아 영업이 잘 되어서 기뻐하며 하루를 마감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밤에 약국에 도둑이 들어와 전날 열심히 벌어두었던 현금을 싹쓸이 가져가고, 놀랍게도 그 당시 숙취음료였던 아스파 두병을 마시고 매대에 나란히 두고 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새해를 그렇게 암울하게 맞이했지만 더 큰 사고가 아닌 것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약국을 개설한지 몇 년이 지나니 단골 고객이 많이 생겼고, 나름대로 번성해 나갔습니다. 음력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시간대에 4~5명의 손님이 대기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급히 약을 달라고 재촉하였습니다. 10만원권 수표였는데 보통은 뒷면에 서명과 연락처를 받아 두는데 그땐 너무 바빠서 그냥 약과 함께, 거스름돈 8만원을 드렸습니다. 대개가 다들 안면이 있는 동네 고객들이어서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요.
그런데 며칠 후 신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수표가 부도수표라고.....
아~~! 동네약국을 상대로도 이렇게 사기를 치는구나! 라는 씁쓸함과 분통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1999년, 분주기와 한약 달이는 기계 도입
의약분업이 실행되기 1년 전인 1999년, 한약과 영양제를 혼합하여 만들어주는 기계(=분주기)를 취급하는 모(某)체인에 가입하고, 1년만 활용해도 본전을 뽑을 수 있다고 하기에 150만 원짜리 기계를 구입하였는데, 1년 후 의약분업으로 임의조제를 할 수 없어 별 혜택을 누리지 못한채 고물상에 넘어 갔습니다.
또 약국영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한방공부를 할 때, 약사는 당연히 초제를 다룰줄 알아야 한다고 하기에 과감히 한약장에 100만원, 한약 달이는 기계에 300만원을 각각 투자하여 가족과 측근들부터 시작해서 첩약을 달이기 시작했고, 감기한약, 보약,치료약 등
열심히 해왔지만 분업 후 그 또한 인력부족 등으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이를 고물상에 헐값으로 넘겼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시작
2000년 여름 의약분업이 시작되었고, 골목마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약국들은 하나 둘 의원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가서 나름대로 정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동네도 8개의 약국이 구간마다 산재해 있었는데, 다들 떠나고 저를 포함한 두 약국만 남게 됐습니다.
우리 약국 주위에는 원래 의원이 없었는데, 의약분업이 시작될 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저희 약국 옆으로 의원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처방전을 들고 주로 우리 약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9월이 정식 분업이고, 8월은 준비 단계이어서 저 또한 1천만 원을 투자하여 분업을 대비한 약국 구조 변경으로 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의약분업을 대비한 솔루션이라는 생각 속에서...
2000년 중반 인터넷 강의
분업 후 조제, 투약, 판매, 상담 등 약국 내 업무가 복잡해지고, 일도 많아지면서 여직원도 채용하고, 파트 약사님도 시간을 늘려서 같이 근무하는 등 3인 구조체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분업 후 몇 년이 지나니, 약국내 일도 많고, 바쁘고 늘 분주하게 보내는데도 날이 갈수록 무언가 허전함이 밀려왔습니다. 처방전에만 신경 쓰느라 그동안 해오던 공부를 중단해 더 이상 약사로서의 일반약이나 한약에 대한 발전이 없이 그저 처방전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손 놓았던 백방 한약과립 강의를 힘든 몸을 이끌고 6개월 수강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00년 중반부터는 인터넷 강의가 활기를 띠면서 일반약, 건식, 한방 등 원하는 공부를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쌓이는 내공을 통해 처방전 없이 약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러 방면의 치료요법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약사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의 건강에 적신호
그러나 동네약국이다 보니까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요일만 제외하고 공휴일까지 아침 9시부터 밤9시 반까지 하루 12시간 이상을 근무하면서 저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 왔습니다.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다 보니 꼬리뼈 주위 피부가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욕창 전 단계 수준이 되어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내 몸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고 치료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또 다른 해결책이 될 만한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그 시기에 지방에서도 임상영양학 강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도권에서만 하는 강의라서 기회만 된다면 듣고 싶었는데...
그 강의는 밤 9시 반에 시작해 12시 반이 넘어서야 끝나는 올빼미 강의였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쌓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는 저의 성미 때문에도 약국근무를 마치고 야간강의 듣는다는 게 제 형편상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1년반을 꼬박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강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영양요법으로 제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 ,측근, 단골들의 건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건물주의 배신으로 건너편 조그만 자리에 정착
하지만 저의 이런 열심과는 달리 세상사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듯 17년을 한 곳에서 동네약국으로 뿌리를 내리며, 우리 약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건만 입주해 있던 약국의 건물주가 바뀌면서 구조 변경을 하느라 잠시 길 건너편 빈자리로 옮겨 있는 사이 건물주는 다시 들어오면 확장 해주겠다는 구두계약을 파기하고 그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파리바게뜨에 넘겨 버렸습니다.저는 졸지에 건너편 조그만 자리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국에만 있느라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게 사람 말을 믿었던 저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과 스트레스였지만 그럴수록 여기서 내가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약국근무와 영양학 공부를 통해 상담환자를 늘려가고 고객을 창출해 갔습니다.
적자가 난 의원의 폐업으로 약국 이전을 고려했지만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초기 분업 때와 달리 날이 갈수록 처방전이 줄어 들다보니 2000년에 개원한 의원은 2006년에 폐업하였고, 다행히 그 자리에 곧바로 후속 의원이 개원하여 이어갔는데, 날이 갈수록 처방전이 더 줄어들어 적자가 난 의원은 2012년 11월말 재정난으로 후속 인수인계도 없이 그렇게 폐업하였습니다. 이제 처방전이 없는 한가해진 12월 그동안 수고한 내 자신을 돌아볼 겸 휴식차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13년 새해를 맞이하고 병원 처방전 없이 일반약과 상담만으로도 약국 운영을 잘 할 수 있을까?! 날이 갈수록 걱정이 되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잘 되지 않아서 폐업한 의원자리에 누가 다시 들어오겠냐며, 이 기회에 처방이 많이 나오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 어떻겠냐며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에서 20년간 뿌리 내리고 정착한 곳, 동네사람들과 정도 많이 들고 저희 약국을 찾는 단골고객들의 대소사, 병력 까지도 대략 다 아는데, 그들을 두고 제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단골고객들도 제가 혹시라도 그만두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합당한 좋은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마음을 새롭게 잡았습니다.
새 체인 가입과 새로운 의원 개원
그것은 처방전이 없어 한가한 낮 동안 새롭게 공부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제가 가입하고 싶은 체인의 공부를 인터넷으로 수강할 수 있어서 가입비도 상당했지만 내 자신과 약국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하루 지내는 어느 날 드디어 5개월 만에 비어있던 의원자리에 새 의원이 개원을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과 감사인지요! 새롭게 시작한 체인 공부는 약사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발전시켜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나를 믿고 우리약국을 찾아온 사람들을 계속 보살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약사로서 크나큰 자부심을 갖게 한답니다.
대한민국에서 약사로 산다는 것은
요즘 날이 갈수록 약사의 직능과 영역이 위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2012년 의약품 슈퍼판매 허용, 그리고 일반약의 전문약으로의 전환, 그밖에 인터넷의 발달로 병과 약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서 고객들이 전문인들 보다 더 많이 아는 체 하고 약사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각종 건강기능식품은 본인들이 홈쇼핑을 보고 먼저 알아서 결정하며, 약국에 와서는 가격비교를 하는 실정입니다. 어떤 이들은 약사는 단지 병원 처방전대로 조제만 하는 줄로 압니다.
의약분업 전에는 약사들 스스로가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그게 약사의 실력이 되어 인정받고 사람들이 믿고 찿아오고 또 약국이란 장소가 문턱이 낮아 동네 사랑방처럼 모든 문제가 있으면 먼저 들려 상담하는 곳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약국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어가는 연약한 환경 가운데 있지만, 비록 시대는 바뀌었어도 약사의 위상은 약사인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에서 약사로 산다는 것은 이런 희망을 꿈꾸며 하루하루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데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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