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한병 줘. 안 줄거야?"

오전 9시 약국 문이 열렸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한 단골 할머니가 출근 도장을 찍었다. 할머니는 한 손에 처방전을 들고 "시원한 박카스 한병"을 연발하며 약국안으로 들어섰다.

"일찍 나오셨네요"라는 약사의 인사를 받으며 박카스 한병을 손에 받아들고 자리에 풀썩 앉는 할머니. 박카스 한 병을 들이키고 일상사를 맘껏 털어 놓았다. 처방전을 맡긴 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 숙취 해소 음료 한병을 한 입에 들이 붓고 케어 가글을 고르는 중년 남성. 5월 30일 약국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네 경로당·버스 정류장 같은 약국= 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종로프라자 약국(대표약사 정영기, 종로구약 회장)은 유독 노인 환자가 많다.

12년째 옥인동에서 경로당 같은, 마을 버스가 잠시 쉬는 정류장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이 약국을 찾는 환자들의 한결같은 답변이다.

"의약분업 직후 이 곳에 터를 잡았어요.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그래서 인지 아침 일찍 인근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고 저희 약국으로 조제를 받기위해 오는 노인분들이 참 많아요."

이렇게 당뇨,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 환자 조제로 하루 아침을 시작하는 프라자 약국이다.

노인 환자가 많다보니, 웃지 못할 사건 사고도 간혹 있다고 한다.

"하루는 주민등록번호가 01로 시작되는 처방전 조제를 하다 깜짝 놀랐어요. 01이면 소아인데 성인 용량 처방이 났기 때문이죠. 보건소에 확인하고 처방전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펴보니 주민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더군요. 1901년생 환자였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지만, 그땐 정말 황당했었죠."

몇해전까지 약국을 찾았던 106세 표모 노인 사연이다.

◆"약이 없어요?"= 오전 내내 장기처방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 대부분 환자들이 장기 조제여서 약사들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자동조제기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제가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약이 없습니다. 다른 회사 약으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처방전을 받아든 약사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어 보였다.

약학정보원 홈페이지를 통해 대체가능한 저가약을 검색한 약사는 다시 환자에게 다가서 동의를 구하고 대체조제에 들어갔다. 이러기를 몇번 반복한 약사.

"주문하는 걸 깜박했어요. 이상하게 약이 떨어지면 그 약 처방이 많이 나오네요. 머피의 법칙인 것 같아요."

처방약 부족 현상은 잦은 약가인하도 한 몫 단단히 했다. 4월 1일 약가인하 당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는 대다수 약국들이 약가인하를 앞둔 품목 재고관리를 타이트하게 관리 하면서 종종 품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약봉투 바꿔 주세요"= 오전 내내 약 조제를 마친 약사. 하지만 쉴틈이 없다.

짧지만 달콤했던 점심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환자들이 몰려온다. 오전에 조제를 맡겼던 환자들도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약을 건네받은 중년의 한 남자가 다시 조제를 해달란다. 이유는 약 봉투가 잘 뜯기지 않는다는 컴플레인이었다.

"안뜯겨요." 또 다른 환자도 같은 이유로 재 조제를 요청했다.

"약 조제에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요. 저용량이 있는데도, 고용량으로 처방해 약을 쪼개야 하는 상황도 있고 알약 복용이 힘든 환자의 경우에는 으깨서 조제해야 해요. 정말 쉴 틈 없네요."

◆역시 약국하면 박카스?= 오후 3시 경. 한 노신사가 약을 조제받은 후 종이와 펜을 달라고 했다.

삐꼼씨, 아로나민 골드, 인사돌 등 각종 일반약과 건강기능식품 이름으로 종이가 가득 채워졌다.

"의사신데 한번씩 오시면 저렇게 약을 구입해 가요. 저희 입장에서야 현금으로 약을 구입해 가니 좋지만, 오남용 우려가 있어 걱정이 되곤 합니다."

잠시 후 중년 남성이 박카스 3박스를 주문했다. "이거 슈퍼용이랑 같은거죠?"

박카스를 슈퍼에서 구입할 수있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약국에서 구입한다고 말하는 중년 신사다.

약사는 이 신사에게 슈퍼용 박카스와 약국용 박카스 차이점을 조목 조목 설명해 줬다.

◆"모기약 판매량이 급감했어요"= 어느틈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환자들로 북적였던 약국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약사도 잠시 여유를 갖고 최근 국회를 통과한 일반약 편의점 판매 허용을 담은 약사법 개정, 공급내역 불일치 약국 조사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첫 마디가 참 억울하단다.

"너무 약국을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할일도 많고 해야할 일 또한 많지만 약국과 관련된 규제가 너무 많아요. 약국 경영 쉬운 게 아닙니다."

이렇게 연거푸 한 숨을 내쉬던 약사. 불현듯이 "모기약 판매량이 급감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POP 제작에 들어갔다. '모기약', '모기 기피제', 내친김에 '어린이 영양제' POP까지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약국 물품 판매량을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예년에 비해 모기약 판매가 눈에 띄게 줄었어요. 슈퍼에, 마트에, 인터넷에 시장이 넘어갔기 때문이죠. 점점 약국에서 팔 수있는 게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네요."

"앞으로 약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국용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가 필요해요. 제약사 등이 약국에서 통할 수있는 제품 개발에 주력해 줬으면 합니다."

정에 얽매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옥인동. 그런 옥인동에 위치한 프라자 약국 시계는 100세를 훌쩍 넘긴 할머니 웃음 소리가 그리워 질 때쯤 6시 30분을 가르켰다.

이렇게 더디기만 했던 약국의 하루는 저물어 갔다.